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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세상에는 남의 말이라면 쉽게 내뱉고 옮기면서도, 그 타인이 자기가 경험은커녕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일을 겪었다고 이야기하면 금세 인상을 찌푸리며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당나귀처럼 완고한 사람들. (중략) 그러면서도 그들은 방금 자기가 들은 이야기가 그럴싸하기만 하면 눈알을 뒤룩거리며 벌써 다른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전달할 생각부터 한다. 진정으로 믿지는 않으면서 말이다. (본문 7p)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이러한 서론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일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시리즈 24번째 이야기 <<고수>>의 첫 시작이다. 책 제목을 보니 북이나 장구를 치는 누군가의 이야기인가 싶다. 주인공은 겨울 지리산에서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앞서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자신이 겪은 이야기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는 몇몇 사람들의 반응탓이다. 헌데 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말도 안된다는 생각 대신 흥미로운 사건에 흠뻑 빠져있었다. 주인공은 자신이 겪고 있는 아픔이나 절망을 에너지로 승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쫌 멋진 녀석이었다. 주인공 소년은 가출 청소년이다. 누구나 가출 청소년에 대해 안 좋은 시선을 가지고 있지만, 주인공은 좀 달랐다. 아버지의 표현에 의하면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엄마를 때리는 일이 마치 엄마를 살리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때리던 아버지는 어디서고 때릴 이유를 찾아내는 귀신처럼 주인공을 때렸다. 얻어 맞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아버지는 아주 냉정한 얼굴로 따귀를 후려치는 것을 시작으로 몹시 교묘하게 계산된 방식으로 때렸다. 아들을 때리는 것에서 어떤 보상을 느끼는 것처럼, 아버지는 점차 괴물이 되어갔고 결국 소년은 아버지라는 사람으로부터 확실히 벗어나기 위해 영원한 작별을 고한 것이다. 길거리 생활이 뭔지 아무것도 모를 만큼 어렸지만, 결심만큼은 확고했던 소년은 노숙으로 대학로에서 길거리 생활을 시작했고 길거리 생활이 2년이 다 되어가던 때는 알바를 해서 번 돈으로 버젓이 드러누워 잘 수 있는 방을 구할 수 있었다. 그가 대학로 노숙 생활에서 길거리 아이들로부터 벗어나 나름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첫날 삥을 뜯으려는 길거리 아이들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비보이 그릅 와이들보이즈 의 리더이자 히로라는 길거리 이름을 가진 아이 덕분이었다. 삥 뜯으려는 놈들로부터 구해준 후 길거리 생활을 대해 이것저것 자상하게 알려준 히로는 소년의 친구이자 영웅이었다. 비보이들의 연습장이자 공연장인 마로니에 공원에서 온몸으로 춤을 추는 춤꾼들이 춤을 추면 소년은 리듬을 두드렸다. 나무젓가락이든 손바닥이든 닥치는대로 가지고 두드리자 소년도 어느 새 고수 라는 길거리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히로는 중요한 비보이 연습으로 바쁜 자신을 대신 해 지방에 있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물건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하게 되고, 고수는 히로가 그려준 약도를 들여다보며 약속 장소인 양조장 앞에서 친구들을 기다렸다. 약속시간이 한참 지난 후 열 명쯤되는 시골 양아치들로부터 이유도 없는 핑계도 없는 싸움이 시작되었고 고수는 길도 없는 숲 속을 헤치며 도망쳤다. 녀석들은 따돌렸으나 히로가 친구에게 전해달라고 한 상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어두운 숲 속에서 두려움을 느끼던 고수는 기골이 장대한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고, 고수는 밤의 숲에 혼자 남는 것이 무서워 할머니를 따라가게 되었다. 여전히 자신을 쫓는 그들로 인해 산을 내려갈 수 없었던 탓에 아주 교묘하게 숲 속 나무들 사이에 숨겨진 오두막에서 고수는할머니와의 기묘한 동거를 하게 되었다. 고수를 찾는 경찰들이 산아래 쫙 깔리면서 할머니와의 동거는 점점 길어졌다. 싸움의 고수가 되고 싶었던 고수는 할머니로부터 싸움을 배우기도 하고, 장작을 해오기도 했으며 할머니에게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했다. 눈사태가 일어나면서 할머니의 집에는 약초꾼과 눈길에 미끄러져 다리를 다친 등산객이 찾아오게 된다. 눈보라로 숲에는 쌓인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뭇가지가 부려져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고, 뒤이어 자잘한 툭툭 하는 소리, 풀썩 하고 눈이 내려앉는 소리와 고요가 찾아오곤 했다. 고수는 어느새 리듬을 헤아렸고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두드렸다. 리듬의 비트가 높아지면서 고수는 자신이 막막함에 사로잡힐 때마다 자신의 곁에 리듬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두드렸다. 리듬을 헤아리고 리듬을 만들면서, 난 그 막막한 시간들을 건너왔다. 아버지에게 얻어맞을 때도, 길거리 양아치들과 싸움에 휘말렸을 때도, 날 버티게 한 것은 리듬이었다. 나는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두려움도 막막함도 어느새 수증기처럼 증발해버렸다. 나는 살아 있었다. 행복했다. (본문 140,141p) 할머니로 인해 등산객의 정체가 형사임이 드러났고, 그로인해 히로의 정체도 드러났다. 영웅이라 생각했던 히로의 실체를 들은 고수는 자신이 눈뜬장님이고 귀머거리였음을 깨달았다. 겨울을 나고 봄이 되자 히로는 곧바로 대학로를 찾아갔고 마로니에 공원 무대에서 히로의 멋진 춤사위에 사람들의 환호성이 쏟아지는 것을 보았다. 고수는 수십 년 동안 머나먼 길을 할멈과 함께 해온 선물받은 북을 꺼내 음악 소리에 리듬을 맞춰 북을 두드렸다. 음악과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한 고수의 북소리에 히로의 발은 자꾸만 꼬였다. 그것으로 고수는 그동안 히로의 거짓 가면 때문에 아이들의 발이 마구 꼬였지만, 이제 히로가 자신에게 맞출 차례임을 선포한 것이다. 히로, 널 패줄 수도 있어. 이젠 나도 싸움에 자신 있거든.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지. 그래 봤자 멍이 좀 들고 뼈가 부러지거나 코피가 터질 뿐이지. 그 대신에 난 네가 잃고 싶지 않아 하는 것으로 겨뤄주겠어. 너의 춤, 너의 리듬, 네가 받고 싶어 하는 시선. 하지만 넌 이제 끝났어! 이 리듬은 나의 것이야! (본문 261p) 아버지가 때리는 소리, 아버지의 핏줄 속을 흐르는 피의 리듬, 근육이 움직거리는 리듬, 심장이 벌떡대는 리듬을 들으며 자신이 겪고 있던 고통으로부터 버텨냈던 고수는 리듬을 통해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제 속의 미움과 분노를 리듬으로 풀어냈고그것은 곧 자신의 고달픔 속에서 찾은 에너지가 되었고,삶의 방식이 되었다. 고수의 가족환경은 그리 평범하지 않았다. 고수처럼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고통이나 슬픔, 절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절망과 싸우는 방법은 제각각 다르다. 그 절망 속에서 에너지를 찾은 고수처럼 환경을 탓하고, 자신의 고통을 탓하기보다는 자신만의 생의 에너지를 가져보면 어떨까? 그것이 바로 삶의 진정한 고수가 되는 법이 아닐런지. 이제 나는 나의 북을 치고 있다. 나의 리듬을 치고 있다. 나의 싸움은 더 이상 히로를 향해 있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과 싸울 것이다. 그리고 끝내 이겨낼 것이다. 세상이 내게 던지는 모든 도전과 시험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게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든, 히로의 얼굴을 하고 있든, 혹은 화산의 얼굴을 하고 있든, 나는 도망치지 않겠다. 모른 체하지 않겠다. 고개 빳빳이 들고 당당히 맞서리라. 그리고 반드시 살아남으리라. 별처럼 빛날 것이다. 나는 머나먼 시원부터 이어져 내로운 나의 우주 그 자체이니까. (본문 263p) 고수가 보여준 삶의 의지, 에너지는 책을 읽는 나에게도 전달되어 지는듯 했다. 마치 고수의 북소리처럼 삶의 에너지가 샘솟는 듯한 심장박동의 리듬소리가 쿵쾅쿵쾅 들려왔다. 진짜 싸움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 싸움의 승자가 바로 진정한 고수가 될 것이다.
이 소설은 우리 유전자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원시의 활기, 들짐승처럼 펄펄 뛰는 야생의 활기를 불어넣어 준다. 고수의 리듬이 살아있는 북소리가 생생히 들리고, 눈과 불의 나라 캄차카 시원의 아름다움이 펼쳐진다. 그 가운데 모든 싸움에서 진정한 승자가 되는 법, 나의 뜨거운 피와 힘을 조절하여 자신을 다스리고 상대방을 제압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김수경 작가만의 색채 짙은 독특한 이야기 속에서 끈질긴 삶의 의지, 생존법을 배울 수 있다.

늑대와 사슴, 곰 가죽을 두드려 그 소리로 허공을 제압하고 마침내 제 속의 미움과 분노까지 풀어버리는 고수. 그는 북 치는 아이다. 아버지의 폭력에서 벗어나 대학로로 뛰쳐나온 고수는 야생과 같은 길거리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한다.

마로니에의 영웅 자리를 지키려는 히로의 불같은 싸움에 쫓기게 된 고수는 얼음 같은 지리산에 갇히고… 그곳에서 얼음과 불의 나라 툰드라에서 온 샤먼 할멈을 만난다. 산전수전 공중전, 험난한 인생 여정을 다 겪은 싸움꾼 할멈을 통해 고수는 눈 덮인 겨울 지리산에서 끈질긴 생의 의지와 진정한 스트리트 파이터로서 살아남는 법을 배운다.